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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n Europe

보르도 비건 타파스 전문 비스트로 Dis L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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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비건, 타파스. 이 세 가지 키워드만 봐도 결코 평범한 곳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베지테리언/비건 레스토랑들이 꽤 있는 보르도에서도 비건 레스토랑의 비율은 많다고 할 순 없다.

상대적으로 좀 더 유연한 편인 일반 베지테리언에 비해 훨씬 더 엄격한 방식의 채식이기 때문이다.

육류나 해산물처럼 재료만 좋아도 적당히 알아서 맛있는 요리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일반 레스토랑과 달리, 재료부터 조리 과정에서 하나하나 따져야 할 게 많은 것이 바로 비건식이다.

 

결국 잡식주의로 돌아왔지만 한때 베지테리언이었던 프랑스인 친구의 추천으로 갔던 곳인데, 처음 가본 비건 레스토랑 경험이었어서 블로그에 공유해보기로 했다.

(보르도 지역에 오고 나서 맛있는 나름 여기저기 레스토랑과 비스트로, 카페, 바를 다녔는데, 갈 때마다 매번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지는 못해 아쉽다)


🥗 "그들에게 말해"

"늑대의 거리"라는 뜻의 Rue du Loup 가에 위치한 작은 타파스 비스트로.

[디 러흐]라고 발음하는 Dis Leur는 영어로 "Tell them", 즉 "그들에게 말해"라는 뜻으로 절대 흔하지 않은 형태의 이름이다.

이름에 담긴 자세한 뜻은 잘 모르지만, 저 두 글자의 조합만으로 왠지 모르지만 '강한 자신감', 혹은 '강한 신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냥 막연한 추측일 뿐이지만, 비건에 대한 선입견이나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알리려는 의도이거나, 혹은 이곳에서 선보이는 음식의 우수성에 대해 알리라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입구에 들어서면 타파스 메뉴를 써놓은 블랙보드를 볼 수 있다. 종이로 된 기본 메뉴도 있는데, 일단 여름 시즌 내내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타파스만 판매한다고 한다.

✔️ 프랑스어로 assiette [아씨에뜨]는 접시(plate)를 말한다.
위 사진의 좌측 하단에 있는 블랙보드의 상단에 적힌 "Assiette salée [아씨에뜨 쌀레]"는 짭쪼름한 음식(savoury food)을, 그 우측 밑에 적힌 "Assiette sucrée [아씨에뜨 슈크레]"는 디저트를 말한다. 
좌측의 Ardoise [아르두아즈]는 석판(slate)을 말한다. 

🧀 비건 치즈 플래터  l'Ardoise fromages végétaux

100% 식물성 재료로만 만들어진 치즈 플래터. 좌측은 로크포흐(Roquefort) 블루 치즈를, 우측은 까망베르(Camembert) 치즈를 재현했다.

프랑스의 치즈 사랑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비건 레스토랑에서 치즈가 웬말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모든 것을 비건 레시피로 요리하는 곳인 만큼 치즈도 100% 식물성으로만 만든다.

한식 비건 레스토랑은 나물, 국, 비빔밥 등 원래부터 채식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전형적인 한식 메뉴를 좀 더 엄격하게 비건식으로 요리하는 게 일반적일 것 같은데, 프랑스 음식의 경우 우유, 버터, 치즈 등 동물성 유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큰데 그 와중에 비건식으로 바꾸려니 레시피 연구 과정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식문화에 있어서는 기준도 높고 까다로운 게 프랑스인들인데, 그중에서도 베지테리언/비건 프랑스인들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로크포흐 치즈를 비건식으로 재현한 게 신기해서 서빙해주시는 분에게 물어봤더니, 주재료 중 하나로 병아리콩이 들어간다고 했다.

아무래도 비동물성 재료 중 특히 높은 담백질 함유율로 잘 알려진 게 병아리콩이라 그런지, 치즈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에도 기본 주재료로 많이 쓰는 듯했다.

일반 로크포흐 치즈보다 확실히 지방질이 훨씬 덜 함유되고, 그 자리를 단백질로 촘촘히 빽빽하게 채운 느낌의 식감이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까망베르가 특히 맛있었는데, 얼핏 듣기로는 밤도 일부 넣었다고 했었던 같았다. 치즈답게 적당히 짭조름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있었는데, 일반 동물성 까망베르에서 지방질이 빠진 느낌이라 식감의 차이는 분명 있었다.

발사믹 소스를 얹은 샐러드 조금과 치즈에 올려 먹는 무화과를 넣은 처트니(chutney).

특히 비건 까망베르 치즈에 함께 나온 처트니를 소량 얹어 먹으면 훨씬 더 입체적인 맛이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물론 종류에 따라 그 궁합이 바뀌지만) 청포도와 함께 무화과는 치즈와 매우 잘 어울리는 과일 중 하나이다.

무화과는 잼으로 만들어도 맛있고, 이렇게 처트니로 만들면 치즈나 푸아그라처럼 꾸덕하고 묵직한 바디감의 음식에 곁들이면 은은하면서도 지나치지 않게 달달한 향긋함을 더해준다.

태어나서 처음 맛본 비건 치즈 플래터는 꽤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타파스 플래터

비건식 자체도 재료 사용의 제한이 많을텐데, 타파스라는 요소까지 더해져 굉장히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지닌 Dis Leur.

개인적으로 음식을 먹을 때 색이 다양한 음식을 선호하는 편인데,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요리한 음식들로 구성되어 일단 시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플래터였다.

속이 야들야들해질 때까지 구워 껍질을 벗긴 뒤 치즈로 채운 파프리카는 생파와 어니언 플레이크 등으로 마무리했는데, 스페인 요리의 영향을 엿볼 수 있었다.

직접 촬영한 영상의 스크린캡쳐 사진.
다양한 식감으로 구성된 타파스 플래터 메뉴.

맥주나 와인에 곁들여 먹도록 안주 느낌으로 준비된 타파스 스타일의 플래터인 만큼 튀긴 음식이 꽤 여럿 있었다.

적양배추 초절임 위에 얹은 팔라펠(falafel), 두툼한 반죽을 입힌 양파 베네(beignet), 직접 자르고 튀겨낸 감자튀김 등 술을 마셔야 그나마 덜 느끼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매운맛으로 느끼함을 줄이는 한국에 비해 프랑스는 이처럼 상큼 시큼한 맛을 주는 '산도(acidity)'로 느끼함과 담백함 사이의 밸런스를 조절하는 경우가 많다.

먹을 때는 꽤 맛있게 먹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그 이름과 사용된 재료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운 요 녀석.

오이와 허브 등을 넣어 입 안에 시원하고 청량감을 주면서도 중앙에 폼(foam)을 올려 굉장히 부드러운 식감이었고, 타임을 비롯한 허브를 넣고 아주 얇고 바삭하게 구워낸 트윌을 꽂아 마무리했다.

이 플래터에서 특히 '프렌치스러운' 성격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요소였다.

육안으로 보일 만큼 듬성듬성 보이는 투박한 소금 덩어리가 오히려 더 식욕을 자극하는 하우스메이드 감자튀김.

감자튀김도 직접 감자를 잘라 내 튀겨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먹는 감자튀김과는 다른 '집에서 만든 손맛'이 더 나는 느낌이다.

그 위에 투박하게 보이는 소금 덩어리들이 오히려 더 식욕을 자극하는 직접 튀겨낸 감자튀김 (프랑스어로는 하우스 메이드 감자튀김이라는 뜻으로 frites à la maison [프리트 아 라 메종]이라고 한다).

얼핏 봐서는 절대 비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테지만, 으깬 병아리콩을 베이스로 다양한 시즈닝을 가미해 맛있었던 비건 파테.

투박하게 꽂혀 있는 막대 스틱을 찍어 먹으면 맥주와 와인 둘 다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사용된 재료나 메뉴들의 특성상, 느끼함을 조금이라도 잡아 주도록 허브를 잘게 썰어 올려준 것을 볼 수 있었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식감에 맛있었지만, 생각보다 양이 많아 같이 간 일행과 다 끝나지는 못했다.


🍮 100% 비건 디저트

슬레이트 지붕 재료로도 쓰이는 ardoise 플레이트에 정갈하게 세팅되어 나온 디저트. 이곳에서는 다양하게 준비된 요소들을 한 번씩 맛보는 흥미로운 체험을 해볼 수 있어 나처럼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걸 좋아하는 이들에겐 참 좋을 것이다.

디저트는 assortiement de 4 desserts, 즉 "4가지 종류로 구성된 오늘의 디저트 세트"를 주문했다.

역시 깐늘레의 고향 보르도답게 작은 미니 사이즈의 깐늘레가 있고, 딸기 쿨리(coulis)를 올린 비건 치즈케이크, 비건 초콜릿과 캐러멜 시럽을 얹은 퍼지케익(베이스 케익의 종류나 이름은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난다)을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 놓았다. 거기에 비건 샹틸리크림과 오렌지플라워를 올려 장식한 시럽에 절인 과일까지 더해져 총 네 가지 종류로 구성된다.

얼핏 봐서는 절대 비건 디저트라고 생각하기 힘들 것 같다.


마무리

전반적으로 동물성 메뉴로 유명한 음식들을 완전한 비건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아이디어와 신념, 기술력은 가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전반적으로 맛의 균형, 식감의 다양성, 적절한 간과 시즈닝이 만족스럽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도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다만 기존의 동물성 메뉴를 비건식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제한되다 보니 병아리콩 등 특정 재료가 겹쳐(비건 치즈, 치즈 케이크, 팔라펠, 파테 등에 병아리콩이 사용되었다), 어느 순간 분명 다른 음식을 먹고 있음에도 특유의 뻑뻑한 고단백 식감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먹는 사람 입장에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레퍼런스가 있는 음식들을 택함으로써, 비건이 아닌 사람들에게 비건 음식에 대한 반감을 줄이고자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오히려 꼭 기존에 있는 메뉴(팔라펠, 파테, 치즈케이크 등)가 아니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비건 메뉴의 비중을 좀 더 늘려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스페인 음식 자체도 그렇지만 보통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타파스의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이지만, 기름을 사용해 튀겨낸 것 외에 다른 조리 방법도 사용되었다면 좀 더 균형 잡힌 메뉴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도 충분히 비건식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메뉴 전체적으로 많은 연구를 기울인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험해 볼 만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재료 자체만으로 치트키라 할 수 있는 온갖 고기와 생선, 가공육, 동물성 육수 등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이가 만족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음식을 만들기란 결코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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