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과도한 커피 섭취로 인한 심각한 마그네슘 부족 증상으로 고생한 이후로 커피를 되도록 자제하려 하는 대신 다양한 차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카페인 등으로 인한 체내 반응은 개인마다 체질에 따라 다르다).
차 애호가들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차에 대한 취향이 있는데, 커피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브랜드들마다 같은 차도 그 맛이 다르고 블렌딩 조합도 달라 새로운 맛의 차를 시음해 보는 재미가 있다.
지난달, 보르도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티 전문 판매 부티크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지나가는 순간에만, 단골처럼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구경할 겸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가 봤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그렇게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다가 맘에 들어 계획에 없던 구매까지 하게 된 마리아쥬 프레르 차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 La Boutique du Thé
몇 주 전, 보르도 시내 작은 골목길들을 혼자 지나다니다가, 한적한 한 길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연달아 들어가는 것을 보고 뭐지? 싶어 가던 길을 멈추고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보르도 내 상점들은 파리만큼은 아니지만 워낙 잘 꾸며지고 품목도 다양한 상점들로 유명한데, 그렇기 때문에 평소 필요한 것들만 정해 구매하는 성향의 나에게는 물론 눈에 보기엔 좋지만 굳이 하나하나 다 들어가 보기엔 귀찮다.
그런데 마치 고풍스러운 유럽의 약국, 혹은 한국의 한약방(?)처럼 보이기도 하는 외관에 이끌려 들어가서 한 번 쓱 훑어보고만 나올 생각이었다가, 그 안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긋한 차 내음에 이끌려 예상보다 좀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마리아쥬 프레르는 한국에서도 차 애호가들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 티 브랜드인데, 그 역사가 자그마치 1854년부터이니 약 170년이 된 셈이다. 프랑스 내에서는 파리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구역인 마레 지구(Le Marais)를 기점으로 하는 것으로 아는데, 보르도에서는 이곳이 마리아쥬 프레르 판매 전문 부티크인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우측 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운 새까만 박스들을 나도 모르게 구경하고 있었는데, 블랙티, 레드티, 그린티, 블루티 등 주요 차 품목별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렇게 일반 티들을 먼저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들어간 재료 조합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뇌에서 혀 위로 그 맛과 향의 감각이 상상되었다 (그렇게 스스로 결제의 길로 이끌어 가는데...).
한국에서도 "사브레"라는 이름의 과자로 알려진 Sablés [사블레]는 버터를 넣고 구운 대표적인 프랑스의 비스킷인데, 차 맛을 더한 Sablés au thé와 슈거캔디 등 차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부가적인 제품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Périgord(페리고르), Limousin(리무쟁), Pyrénnées(피레네) 등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서 생산된 꿀들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뽕으로 불리는 mûrier, 즉 멀베리(mulberry) 꿀과 밤꿀, 로즈마리 꿀 등이 있다.
제품 추천에서 구매로의 전환 과정
한참 차들을 둘러보다가, 봄, 여름이고 해서 블랙티처럼 묵직한 차보다는 가볍고 향긋한 그린티 베이스 차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그린티 섹션에 있는 차들을 모두 둘러보다가 Marco Polo 그린티에 적힌 재료 조합이 마음에 들어, 잠시 망설이고 있었는데 마침 혹시 도움이 필요하냐며 조심스레 다가온 남자 직원분의 도움을 한 번 받아보기로 했다.
(얼마 전 궁금해서 온라인에 "Mariage Frères의 마르코 폴로 티"를 검색해 봤더니, 블랙티, 그린티 등 티 종류별로 있는 브랜드의 대표적인 시그니처 제품 중 하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차의 특성을 말했더니, 직원분께서 몇 가지 차를 제안해주셨다.
Marco Polo가 괜찮아 보이냐고 어떠냐고 했더니, 그건 너무 유명해서 뻔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좀 더 색다른 차들도 추천해 주었는데, 그렇게 총 세 가지 종류의 차로 선택의 폭을 줄여보았다.
그러다가 직접 향도 맡아볼 수 있다며, 계산 데스크 쪽으로 안내받았는데, 거기서 세 종류의 찻잎들이 담긴 큰 통 세 개를 꺼내와 하나씩 그 냄새를 맡도록 도와주셨다.
그렇게 한동안 결정장애의 모먼트를 지나, 그 순간 가장 꽂힌 Montagne de Jade라는 차를 골랐는데, 그전에 나머지 두 차의 장점들에 대해 한창 설명해 주셨던 직원분이 "아, 그렇게 실컷 설명해 드렸지만 결국 전혀 다른 나머지를 고르시네요 하하"라며 프랑스식의 농담을 던졌다.
그래서 "아, 제가 원래 좀 반항적인 기질이 있는가 봐요(?) 하하😅"하며 서로 웃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제품을 준비해 주시는 사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마침 브랜드에서도 한국을 영감으로 한 제품이 두 가지 있다며 보여주셨다.
"새벽의 차"라는 뜻인 Thé de l'Aube라는 이름의 한국차(Thé de Corée)였는데, 실제로 차가 담긴 틴에도 한국어로 "차"라고 크게 쓰여있는 걸 보고 괜히 반가웠다.
직원분을 통해 직접 향을 맡아봤는데, 온라인으로만 사진을 봤을 뿐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보성 차밭의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한국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
프랑스에서 한국은 묘하게도 '고요하고 차분한 새벽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이는 19세기 동아시아에 도착했던 유럽의 탐험가들과 동양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생겨난 별명이다.
이들이 19세기 조선을 "Pays de l'élégance matinale(우아한 아침의 나라)", "royaume de la Sérénités du matin(고요한 아침의 왕국)" 등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한 것이었는데, 당시 세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동양의 나라 조선에 대한 수식어에서 비롯된 것이 "le pays du matin calme(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실제로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이 수식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랑스인들을 간혹 볼 때가 있는데, 물론 오늘날 한국의 이미지는 그와는 정반대라는 것 또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다음에는 기성제품으로 진열된 상품들 말고, 직접 카탈로그를 보고 골라서 현장에서 바로 찻잎을 원하는 양만큼 구매하면 같은 차도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팁도 알려주셨다.
결제하면서 이야기하는 사이, 6개월마다 한 번씩 그곳에 들르는 어떤 한국인 여자 손님이 있는데 한국어로 자기 이름을 써줬다며 스마트폰으로 흰 종이에 "디미트리"라고 또박또박 쓰인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가 "디미트리"라고 했더니 맞다고 반갑게 웃으셨다.
그래서 "Pierre" 같은 이름은 한국식 발음으로는 실제 프랑스어 발음과 꽤 다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아니길 다행이라며, 한국어로는 "피에르(한국식으로 분명하게 발음했다)"였을 거라고 "디미트리"는 두 언어 사이 발음에 있어 큰 차이가 없어 운이 좋다고 농담처럼 건네었는데(?), 옆에 있던 다른 직원분과 중년의 한 여자 손님도 슬쩍 듣고는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후후).
마리아쥬 프레르 Mariage Frères
한국에서도 차를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선 이미 잘 알려진 마리아쥬 프레르는 음식도 정말 잘하고 차를 즐겨마시는 한 친구가 좋아한다고 해서 연상이 되는 차 브랜드이다.
Mariage [마리아쥬]는 프랑스어로 원래 '결혼(marriage)', frères는 '형제들(brothers)'를 뜻하는데, 그래서 마리아쥬 프레르(Mariage Frères)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엥? 결혼+형제?'하고 특이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었다.
알고 봤더니 성이 Mariage라는 두 형제가 창립한 회사였다는 걸 알고 '그럼 그렇지' 싶었다.
1660년경 마리아쥬 형제의 선조들은 루이14세왕과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대신해 새로운 이국적인 맛과 향을 찾아 머나먼 항해길을 떠났는데, 그 뒤로 마리아쥬 가족에 대한 차(tea)에 대한 열정은 수세기간 이어져 내려오며, 가족 우수한 품질의 티를 만드는 전통적인 프랑스 티 브랜드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제품의 상자에 쓰여있다.
몽타뉴 드 쟈드 Montagne de Jade 후기
Jade는 영어 [제이드] 로도, 프랑스어 [쟈드]로도 같은데, '옥'을 말한다.
Montagne de Jade는 즉 '옥의 산'을 뜻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태국, 미얀마, 라오스 3국의 메콩강에 인접한 산악 지대를 일컫는 "황금의 삼각지대(골든 트라이앵글)"의 대표적인 과일들 중 말린 망고, 파인애플, 바엘에 건조된 장미꽃잎, 금잔화 꽃잎을 더한 향긋한 블렌딩의 녹차이다.
보통 처음 언박싱할 때 은색 종이를 뜯고 열어야 하는 티 제품들이 많은 것에 반해, 마리아쥬 프레르는 이렇게 통조림처럼 손잡이를 잡고 열어 올리는 금속으로 마감되어 있어 내부에 들어 있는 차가 더 잘 보존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Montagne de Jade는 사실 결정하기 전에 그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차분하면서도 "옥색(jade)"이 연상시키는 느낌이 와닿았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향 했던 다른 두 가지 차도 향이 너무 좋아서 고민이 되었지만, 6월~8월의 더위에 깨끗하게 마실 수 있는 향긋하면서도 가볍고 평범하지 않은 그린티를 찾고 있었던 나의 니즈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확실히 일반적으로 티백 형태로 판매되는 평범한 티 제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향과 맛을 선사한다.
일단 뜨거운 물을 부어 넣어두고 나중에 티폿 안을 들여다보면 뜨거운 물에 건조했다가 물기를 머금고 활짝 피어난 찻잎과 꽃잎의 형태가 그대로 살아있었다.
적당히 달달하고 플로럴한 향이 나는데, 그 밸런스가 딱 적당한 게 마음에 든다. 너무 달달한 느낌이 강하면 인공적인 느낌이 나서 다소 거부감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다수 카페들에서 마시는 차나 마트에서 판매되는 차들은 가루에 가까운 형태로 온전한 건조된 찻잎의 형태를 보기 어려운 경우가 흔한데, 내가 마시는 차잎의 형태가 온전히 보이는 차는 분명 전혀 다른 맛을 품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커피의 맛을 참 좋아했지만, 커피는 분명 '서두름'의 음료이다.
반면 차는 '느림의 미학' 문화 그 자체인 음료이다.
커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이탈리아인들은 의자가 없어 선 상태로, 작고 둥근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에스프레소 한 잔을 몇 모금 마시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난다.
비교적 빠른 속도로 마시는 커피보다, 천천히,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면서 그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차가 가진 매력은 그 반대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무리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블렌딩 차 경험이었다.
Mariage Frères 제품은 온라인 주문도 가능하지만, 지난번 갔을 때 직원분의 기분 좋은 환대도 그렇고, 직접 향을 맡아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차도 현장에서 원하는 양만큼 직접 찻잎을 구매하면 조금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으며, 회원등록한 상태라 몇 번의 구매 후 회원 전용 특별 할인의 혜택도 받을 수 있다는 등 여러모로 장점이 많아 다음에도 직접 이곳에 들러 차를 구매할 것 같다.
평균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제품군의 가격대는 18~20유로가 가장 많고 24~28유로의 좀 더 고가 제품도 있는데, 차를 좋아한다면, 계절에 따라 한 번씩 특별한 차가 마시고 싶을 때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는 "확실한 소확행 아이템"일 거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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